바다
내가 그녀를 만난 곳은 파도치는 바닷가의 해변이었다. 에메랄드 빛의 바다로 둘러싸인 나의 마을에 놀러온 한 명의 처녀. 그 처녀의 청순하며 아름다운 모습은 내 마음을 사로잡는 데 충분했다.
황금과 같은 노란빛의 긴 머리를 뒤로 묶고 평민들이 많이 입는 양모 드레스를 입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매우 아름다웠다. 만약 그녀가 고급진 리넨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면, 많은 귀족들의 구혼을 받았으리라.
그녀의 얼굴에는 미소가 없었다. 미소 뿐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표정이라는 것이 없었다. 항상 그녀는 무표정으로 에메랄드 빛 바다 너머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바다 건너에 그리운 장소라도 있는 것일까, 장소가 아니라면 애인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녀의 모습은 매우 아름다웠기에 애인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을에 마차가 들어올 때면, 그녀는 마차에서 내리는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확인했다. 그 때 뿐이었다. 그녀가 표정을 짓는 것은. 그녀는 모든 사람들을 확인한 후에 아쉬운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다시 바닷가로 향했다. 그리고는 다시 하염없이 먼 바다를 바라보았다.
내가 다가가도 되는 것일까. 몇 번의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나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오랜 시간 밖에 있었던 것인지, 아름다운 그녀의 머릿결에서는 향긋한 바다향기가 났다.
내가 다가가자, 그녀는 나를 힐끔 바라보고는 다시 먼 바다를 바라보았다. 나는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가 누구를 기다리냐고 물었다. 하지만,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고 나는 그녀 옆에서 그녀가 바라보는 바다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다음 날, 나는 다시 용기를 내어 그녀에게 물었다. 이번에도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포기하지 않고 몇 번이고 계속 그녀에게 물었다. 그녀는 나를 피해 멀찍이 떨어져 다시 바다를 보았다.
내가 그렇게도 싫은 것일까. 나는 그 날 이후로, 그녀를 멀리서 바라보기만 했다. 그녀에게 다가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녀는 나를 피하고 있었기에, 내가 그녀에게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의 마음 안에는 오로지 그녀가 기다리고 있는 사람 뿐일 것이었기에 내가 비집고 들어갈 자리는 없었기에 그녀가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듯, 나 역시 그녀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렇게 몇 달, 몇 년이 지나고, 그녀는 조금씩 늙어갔다. 나이를 먹어 주름이 생기고, 나 역시 그녀와 같이 나이를 먹어 주름이 생겼다. 언제나처럼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던 도중 무슨 용기가 난 것인지,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 다시 한 번 물었다. 무엇을 기다리냐고.
그제서야, 그녀는 나에게 말을 해주었다. 그녀가 기다리는 것은 그녀의 동생이었다. 이때까지 그녀가 기다리는 것은 애인이었던 것이라 생각했던 나는 마음속으로 기뻐했다. 그녀의 마음속에 자신이 들어갈 자리가 있었다는 것이 너무나 기뻤다.
그녀는 어쩌다가 동생이랑 떨어지게 된 것일까,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내게 대답했다. 그녀가 동생과 떨어진 이유, 그녀의 아버지가 남긴 빚으로 인해 동생이 노예로 팔려간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 역시 노예였다. 귀족의 노예로 팔려갔던 그녀는 동생과 함께 귀족에게서 탈출했지만, 동생은 귀족의 병사에게 잡혔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직접 겪어보지 않은 나의 말은 그녀에게 아무것도 와닿지 않을 것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왜 지금에서야 다 말해주는 것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나에게 대답했다. 원래 그녀는 동생이 오면 더 먼 곳으로 도망치려고 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동생이 오기까지 기다렸지만, 몇 년이라는 세월이 지나도 동생은 오지 않았고, 이제 그녀는 동생을 놓아주려 한다고 했다.
동생을 포기한다는 말에 커다란 슬픔이 담겨있는 듯 했다. 드디어 그녀는 바닷가에서 처음으로 표정을 지었다. 울먹이는 그녀를 나는 안아주었다. 사랑하는 여자가 동생을 기다리는 것을 포기한다는 게 마음이 아팠지만, 내가 도와줄 수 없는 일이었기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녀를 행복하게 해주어 슬픔을 중화시키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 날 이후부터, 나는 그녀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기 위해 여러 가지를 시도했다. 그녀의 앞에서 재주도 부리고, 마을 안의 흥미로운 이야기와 재미있는 사건들에 대해 이야기해주며 그녀에게 미소를 주려고 노력했다. 처음에는 그녀도 미소를 짓지 않았지만, 시간이 점차 지나갈수록 그녀는 웃는 모습을 나에게 보여주었다.
그리고 얼마 후, 나는 그녀에게 내 생 처음으로 프로포즈를 했다. 잠깐동안 고민하던 그녀는 마침내 나의 프로포즈를 받아주었고, 그녀와 나는 많은 사람들의 축복속에서 결혼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결혼한 지 얼마 지나지않아 마을에는 심각한 전염병이 돌았다. 나와 그녀는 최대한 걸리지 않도록 신경썼지만, 결국 그녀는 전염병에 걸렸다. 그 날, 나는 내 생 처음으로 통곡했다.
그녀의 상태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점점 더 악화되었다. 의사에게 받은 약도 소용 없었다. 그녀는 조금씩 죽음의 구렁텅이로 빠져들어갔다.
뼈가 보일 정도로 수척해진 그녀의 얼굴과 몸을 보니, 내 심장에 비수가 꽂힌 것처럼 마음이 아파왔다. 그녀의 손을 잡고 슬퍼하는 나에게, 그녀는 힘겹게 미소를 보이며 나를 달래었다.
이제는 움직일 기운조차 없는 것인지, 그녀는 눈을 뜨지 않고 며칠 내내 숨만 쉬며 누워있었다. 이렇게 고통을 줄 것이라면 빨리 데려가 달라며 나는 신에게 기도했지만, 신은 나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았다.
그렇게 기도한 지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신은 드디어 그녀를 데려갔다. 이미 내 눈물샘은 말라버려 그녀가 죽었을 때는 눈물이 흐르지 않았다. 많은 사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녀의 시체를 바닷가에 묻어주었다.
그리고 그녀가 죽은지 1년이 되는 오늘, 나는 그녀의 묘지 옆에 의자를 놓고 앉아서 그녀가 보던 바다를 본다. 아름다운 에메랄드빛 바다를 바라보며 그녀가 동생을 기다리는 것처럼, 하염없이, 그저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며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를 생각하며 나는 천천히 잠에 빠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