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쟁이파록 2018. 1. 21. 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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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린 시절은 핏빛으로 물들어있었다. 아버지는 산적의 칼에 맞아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나와 함께 노예로 팔려가 버티지 못하고 나무에 목매달아 자살하셨다.


그 뿐만 아니라, 나의 친한 친구였던 마르코는 노예꾼들에게서 도망치다가 활에 맞았다. 죽지는 않았지만 노예꾼들은 마르코를 붙잡고 각목으로 쳐댔고, 결국 마르코 역시 머리에 피를 흘리며 서서히 죽어갔다.


나는 아직 뛰어놀고 있을 나이부터 노예가 되버렸고 주인의 부탁을 도왔다. 좋게 말해 부탁이었고 그 부탁의 내용은 거의 살인 청부였다. 


맨 처음 주인이 귀족 한 명을 가리키며 나에게 칼을 쥐어줬을 때는 겁에 질려 팔다리가 부들거렸다. 


처음으로 사람의 몸에 칼을 박아넣었을 때는 아직까지 잊혀지지 않는다. 처음에는 부드럽게 찔러 들어가다가 뼈에 걸려 잠깐 멈추고, 칼손잡이를 돌려 뼈 사이로 칼을 집어넣을 때의 그 감촉.


그런 것을 끔찍하게 느끼기에는 내 나이는 너무나 어렸다.




주인의 살인 청부는 내가 커 18세가 될 때까지 계속 되었다. 처음에 떨렸던 팔다리는 세 번쨰 살인 때 조금씩 나아지더니 일곱 번째가 되니 부들거림은 사라지고 죄책감의 모서리는 완전히 깎여나가 아프기는 커녕 오히려 나의 마음을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었다.


내 삶의 이유는 오로지 주인이 시키는 살인 뿐이었다. 아마 15세 때 부터일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 주인은 나에게 살인 이외의 것은 시키지 않았다.


주인은 무조건 살인이 필요할 때만 나를 불러 목표물을 건네주었고, 그 때마다 나는 목표물을 찾아가 영원한 안식을 선물해주었다.


내가 한 번의 실수없이 잘해주니 주인은 날 매우 아꼈다. 다른 노예들은 곰팡이가 핀 빵과 다 상해 뭉쳐진 우유를 마실 때, 나에게는 정상적인 빵과 우유 그리고 스프까지 주었다.


그 것 때문일 것이었다. 내가 주인의 말을 거역하지 못하고 계속 살인을 저질렀던 것이. 다른 사람들이 주인이 건네준 빵과 우유를 먹고 배를 움켜잡고 있을 때, 주인에게 팔려간 초기를 제외하고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그 정상적인 한 끼를 위해, 나는 몇 명의 사람을 죽인 것일까. 조금 후회도 되지만, 아마 그 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나는 바뀌지 않고 사람을 죽일 것이다.


한 끼의 소중함을 아는 사람이라면, 나와 같은 처지의 노예들이라면 아마 내 말 뜻을 이해하리라.


17세의 나이. 젊은 나이일 수도, 어쩌면 갓 성인이 된, 어리지는 않은 나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 시기에, 나는 한 소녀를 보았다. 목표물이었던 귀족의 딸인 소녀였다. 아름다운 핑크빗 머리카락에 다른 사람을 매혹하려는 듯 붉게 물든 눈동자. 어린 시절의 편안함을 느끼게 해주는, 하나도 트지 않은 부드럽고 윤기나는 입술.


나는 주인이 말했던 목표물을 잊고 계속 그녀를 따라다녔다. 신분도 신분인지라,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뒤에서만 조심스레 바라볼 뿐이었다.


그녀가 귀 앞으로 삐져나온 머리카락을 뒤로 넘길 때면, 내 심장을 어둡게 가렸던 커튼까지 전부 걷히는 듯 했다.


손으로 부드러운 입술을 가리며 웃을 때는 구정물에 빠진 내 심장을 갈고리로 꺼내 올리는 듯 기분이 좋아졌고 그녀의 맑고 고운 눈망울을 보고 있을 때면 그녀의 반짝이는 눈동자가 피로 젖은 내 뇌를 맑게 씻어내는 것 같았다.


조금씩 다가갈까. 가까이 다가간다면 눈치채지 못하겠지.


온통 머릿속에는 그녀에게 어떻게 다가갈까 그 생각 뿐이었다. 우연을 가장한 만남도 생각해봤고, 위험에 처한 그녀를 구하는 것도 생각해봤다.


그러나, 생각 뿐이었다. 살인과 다르게 나는 계획을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났다. 주인은 계속해서 목표를 처리하라고 사람을 보내지만, 나는 처리할 수 없었다. 내가 그녀의 아버지를 처리한다면, 아마 매우 슬퍼할 것이겠지.


그녀의 우는 모습은 보고싶지 않았다. 물론 외견상으로는 매우 아름다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렇게 구슬같이 아름다운 눈동자에 고인 눈물이란 그 누구의 마음도 치료할 수 있는 마법의 약 엘릭서같은 존재이리라.


하지만, 그 모습이 보기 좋다고 해서 그녀를 울리는 짓은 할 수 없었다. 1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녀는 내가 자신을 따라다닌다는 것을 모르고 있을 것이었다.


그렇기에 그녀의 아버지를 처리한다 하더라도, 그녀는 내가 했다는 것을 모를 것이다. 그녀의 아버지를 처리하고 다시 그녀를 따라다닌다면 주인의 욕도 듣지 않고 편하게 그녀를 지켜볼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면, 높이 뜬 태양보다 밝은 그녀의 미소를 더는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하지 않았다.


그리고 반년이 흐른, 내가 처음으로 노예꾼에게 잡혔던 그 날, 나는 그녀의 아버지에게 붙잡혔다. 내가 병사를 따라 그녀의 아버지가 있던 응접실에 도착했을 때, 그녀도 함께 있었다.


그녀가 처음으로 날 본 그 표정은 잊히지 않았다.


마치 돼지가 싸놓은 똥덩어리를 보는 듯이 바라보는 그녀의 표정은 평소에 기억하고 있던 나의 뇌속에 떠오르는 그녀의 모습과는 너무나 달랐다.


누가 보냈냐는 그녀의 아버지의 질문에 내가 아무런 대답을 하고 있지 않자, 나를 죽이자는 그녀의 아름다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니, 그녀는 나의 얼굴을 발로 차며 욕설을 내뱉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병사에게 나를 감옥에 쳐넣으라며 소리쳤고, 병사는 짧게 대답을 하고 나를 감옥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이틀 후 오늘, 감옥의 문이 열리며 병사가 나를 찾아왔다. 그리고 나를 밖으로 끌어냈다.


그를 따라 가보니, 넓디 넓은 정원에 세워진 단상 하나와 사람의 목이 하나 들어갈 정도로 동그랗게 매듭지어진 밧줄이 있다.


병사는 나를 그 단상 위로 밀었다. 고개를 돌려 병사를 바라보니 그의 모습에 이때까지 죽였던 사람들의 모습이 비쳐보인다. 아마 자신을 죽였기에 나를 데려가려 온 것이겠지.


앞을 보니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 그녀의 아버지가 보인다. 무표정으로 앉아있는 그는 무언가 말을 하고 있지만, 지금 내 귀에는 들려오지 않는다.


주변을 돌아보니 그녀는 없다. 내 추한 꼴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기에 다행이라고 생각하지만, 왠지 모르게 아쉬운 마음이 든다.


천천히 밧줄을 목에 건다. 까슬까슬한 밧줄의 느낌이 별로 좋지 않다. 단상이 사라진다면 목이 죄여 고통스럽게 죽어갈 것이다. 무섭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


내가 처음 살인을 했을 때처럼 팔다리가 떨려오고 숨이 가빠진다. 아무리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쉬어보지만 나아질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병사가 다가온다. 내 발 밑 단상을 빼러 오는 것이겠지. 나는 최대한 숨을 참기 위해 크게 들이쉬었지만 갑자기 단상을 발로 차버리자 내 폐에 모아져있던 숨이 단번에 빠져나간다.


숨이 막힌다.


고통스럽다.


그래도 다행이다.


이 모습을 그녀가 보지 않아서.


죽어가며 나는 저택의 창가로 눈을 돌린다.


창가에는 그녀가 있다. 그렇게 바라고 바라던, 날 보며 미소짓는 그녀의 모습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