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앞에서 -6-
저것이 태양인 지 아닌 지는 중요하지않았다. 내 눈 앞에 보이는 것은 완전한 빛. 그 빛을 따라 걸어간 지 얼마나 됐는 지 기억나지도 않았고, 알고싶지도 않았다. 조금만 더 걸어가면 저 태양처럼 보이는 것에 도달할 것 같았지만, 그 태양은 그것이 다가갈 수록 점점 멀어지기만 할 뿐이었다.
그것은 태양에게 다가오라 손짓했지만, 그 손짓은 물에 빠진 하루살이의 작은 날갯짓에 불과했다. 아주 작고 나약한 그것의 손짓에 태양은 반응조차 하지않았고, 그는 조금씩 어두워지는 공간에 갇혀만갔다. 그것은 자신이 왜 이 빛을 향해 가는 지 알지 못했고, 또 이 어둠속에 왜 갇히고싶지않은 지도 알지못했다. 때때로 그 빛을 따라가는 것을 멈추고싶었지만, 본능때문이었다. 이 본능이란 것은 빛을 따라가야한다고 계속 그것에게 속삭이고있었다.
30년이라는 시간이 더 지났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지만, 이 곳에는 강산따위는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앞에는 빛이 있고, 뒤에는 어둠이 있을 뿐이었다. 그것은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 지는 알지못했다. 그저 오랜 시간이 지났다는 것만 알고있었다. 그리고 그 빛을 따라가는 것에, 본능도 서서히 지쳐가고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아주 천천히 따라가는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다. 그 줄어드는 속도가 정말로 미세해 누군가 봤다면 알아차리지 못했을테지만, 이 공간 안에는 그것 혼자뿐이었다. 그가 완전히 멈추는 데는 10년이라는 세월이 지났다.
그것이 제자리에 멈췄을 때, 빛도 자리에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아무것도 없는 얼굴을 빛을 향해 들어올리고 가만히 바라만보았다. 따스하고도 포근한 그 빛. 마음같으면 그 빛에 다가가 꼭 안아주고싶지만, 빛은 그것을 싫어하는 지 다가갈수록 점점 멀어져만 가 그럴 수는 없었다.
그것이 자리에 멈추자, 그것의 옆에 누군가가 다가와 빛을 보며 그에게 말했다.
"어때, 따뜻하지?"
그것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에게 옆에 있는 누군가는 중요하지않았다. 그것은 그저 가만히 쉬고싶었다. 이 때까지 한참을 걷고, 또 걸었기 때문에, 그것은 완전히 지쳐있었다. 그러나, 쉬고싶다는 마음이 간절했는데도, 본능이라는 것은 그것을 허락하지않았다. 그가 쉬기가 무섭게 본능은 다시 그것의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아주 천천히 움직이는 그것. 흰색의 얼굴에서는 보이지않았지만, 그것은 정말로 괴로워보였다. 눈, 코, 입조차 없는 그의 얼굴에는 오로지 고통스러운 주름만이 지어지고있었다.
그것이 천천히 걸어가자, 남자는 그것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걸어나가려 안간힘을 썼다. 마치 걸어가지않으면 죽는다는 듯이, 고통스러운 얼굴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계속, 계속 걸어가려했다. 그러나, 그것의 힘보다 남자의 힘이 더 강했다. 남자는 그의 어깨를 놓아주지않고 가만히 잡고만 있었다.
"이제 쉴 때도 되지않았어?"
그것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쉴 때가 아니라고, 아직은 더 걸을 수 있다고.
"너는 이제 한계야."
그것은 다시한번 고개를 저었다.
"이제 그 정도면 됐어."
남자의 마지막 한마디에, 그것은 힘을 주는 것을 멈추고 고개를 떨구었다. 흰색의 얼굴에 투명한 물방울이 한방울, 한방울 떨어지기 시작했다.
"너는 열심히 했어."
그 말을 듣고싶었다. 이 때까지 들어보지못했던 말. 그것은 천천히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양손을 보며 얼굴에서 떨어지는 흰색 가루들을 눈물로 적셨다.
그것이 주저앉자, 남자는 그것에게 다가와 천천히 머리에 손을 올렸다. 그러자, 그것의 눈앞에 희미한 광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작디작은 아기의 손가락, 그 손가락 사이로 보이는 거대하고 주름진 거무튀튀한 손. 아기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고, 그 미소를 따라 남자의 얼굴에도 미소가 차올랐다. 처음으로 보는 자신의 아기, 아기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해주고싶었고, 아기를 위해서라면 몸 하나 바칠 자신이 있었다. 회사에서 욕을 먹더라도, 그는 아기를 위해 자존심을 굽혔고, 그는 아기를 위해 열심히 일을 했다. 그리고 몇년이 지나, 아기가 학교에 들어가게 되었다. 아기는 어릴 때보다 더 자란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그의 손을 붙잡고 입학식을 치뤘다. 그의 눈에는 언제나 처음 봤을 때, 그대로 아기처럼 보였지만, 벌써 아기가 초등학생이 되었다는 것에, 그는 시간이 빠르다는 것을 느낌과 동시에 더 열심히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는 더욱 열심히 일을 했다.
어느 날, 아이가 다쳐서 집에 들어왔다. 몸에 난 작은 타박상이었지만, 그의 눈에는 마치 아이가 칼에 찔린 것처럼 크게 보이기만했다. 그래서 병원에도 가보려했지만, 아이는 고개를 저으며 가기를 거부했다. 그래서, 그는 매일 밤, 아기가 잠든 틈을 타 그 커다란 상처에 약과 밴드를 붙여주었다.
아이가 중학교에 들어가고, 어느날부터 아이는 조금씩 그와 말하는 횟수를 줄여나갔다. 그는 아이와 더 오랜시간, 더 많이 대화를 하고싶었다. 그래서 자신이 직접 다가가보기도했지만, 역시 아이는 그를 피하는 듯 조금씩 멀어지기만 했다.
아이가 고등학생이 되고나서, 하루에 그와 말하는 횟수는 한번 내지 두번밖에 없었다. 그는 다가가는 것도 점점 지쳐만갔고, 아이도 별로 좋아하지않았기에, 그는 더이상 다가가지않았다. 그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일 하나뿐이었다.
아이가 성인이 되고 어느 날, 한 여자를 데려와 그에게 말했다.
"결혼하고싶습니다."
아직까지도 그는 아이가 그저 처음 봤던 때와는 별반 다르게 보이지않았다. 그저 어리게만 보이고, 사랑스럽게만 보였다. 그런 아이가 벌써 결혼을 하려고 한다는 것이 그에게는 걱정스러울 뿐이었다. 그러나, 아이의 눈에서는 반드시 이 여자와 결혼하고싶다는 희망이 가득했기에, 그는 승락했다. 그렇게 아이는 결혼을 했고, 집은 그가 사주었기에, 그가 이때까지 모았던 돈은 사라지고, 빚도 지어 보탰기에, 그에게 남은 것은 아들이 자신에게 준 빚과 일뿐이었다.
아내가 죽었다. 벌써 30년을 함께 지내온 아내가 병에 걸려 고통을 받으며 서서히 사그라들어갔다. 아내는 나를 위해서라도 생명의 불씨를 키우려했지만, 젖어버린 장작에는 불씨가 붙을 수 없었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는 아내가 죽기 전까지 항상 웃으며 아내를 보았다. 장례식 날, 아이는 자신의 어머니의 장례를 치루며 구슬피 울었다. 그 모습에 그 역시 참았던 눈물을 쏟을 수 밖에 없었다.
이제 그역시 서서히 생명의 불씨가 꺼져가는 것을 느끼고있었다.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량은 적어지고, 그와 반비례로 들어가는 약은 많아졌기에, 그는 약을 먹는 것을 멈췄다. 어차피 이 약을 먹으면 먹을수록 고통만 커져간다는 것을 알았다.
어느새 그는 병원에 누워있었다. 들어가지않는 힘으로 주먹을 억쥐로 쥐어보지만, 얼마가지않아 주먹은 힘을 잃고 펴졌고, 그는 힘이 들어가지않는 손을 보고 웃었다.
그가 죽기 바로 전 날, 마지막으로 보는 아이의 얼굴이 눈에 밟혔다. 아직까지도 어리게만 보이는 나의 아이. 그 아이는 자신이 죽어서도 똑바로 살아갈 수 있을까, 그저 그의 머릿속에는 걱정만이 있을 뿐이었다. 자신처럼 평생 일과 붙어살지만않았으면 좋으련만, 그러나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돈을 벌기 위해서는 일을 해야만 먹고 살 수 있기에, 그는 눈물을 흘렸다. 자신과 같은 운명이 되리란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저 눈물만 하염없이 흘렀다. 그러자, 옆에 있던 아이도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작디 작은 그 아이의 얼굴에 흐르는 눈물이 너무도 안타까워 그는 한층 더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얼마가지않아, 그의 손에 힘이 빠졌고, 그의 눈은 천천히 감기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없었던 그것의 얼굴에 어느새 눈, 코, 입이 생겨있었고, 그 눈에서 투명한 눈물이 쏟아져 흘러내렸다. 그 흘러내리는 눈물은 바닥에 떨어져 어두웠던 그 자리를 새하얗게 물들이고있었다.
"이제 그만하면 됐어."
남자가 말했다. 그것은 바닥에 엎드려 소리를 내며 통곡했다. 자신이 죽었다는 것에 대한 고통때문에 흘리는 것이 아닌, 아들에 대한 걱정때문이었다. 아직까지 해줄 것이 많은 나의 아이인데, 그 아이를 어두운 현실에 놓고 간다는 것이 정말 안타깝기만 했다.
"이제 편안한 곳으로 가자."
남자가 그의 어깨에 손을 대며 말했다. 그것은 울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한참을 더 울은 뒤에야, 그것의 얼굴에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이 멈추었다.
그것이 울음을 멈추자, 남자는 그것의 손을 잡고 천천히 빛을 향해 걸어갔다. 그 빛을 향해 발을 한발짝 한발짝 내딛을수록 그것의 주변은 점점 더 밝아져 어둠은 천천히 사라져갔다. 그리고, 빛은 더이상 움직이지않고 그것을 기다려주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더욱 더 강하게 빛나는 그 빛에 그것은 정신이 빠져들었고,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손을 잡고있던 남자는 사라져있었다. 그는 처음처럼 그 빛을 향해 계속 걸어갔다. 그리고 빛에 거의 다다랐을 무렵, 빛 안에서 무언가 형체가 보이기 시작했다. 사람처럼 보이는 그 형체는 몸에서 빛을 뿜어내고있었고, 마치 기독교에서 보던 예수님처럼, 그 형체는 그가 다가올수록 더 강한 빛을 내뿜었다. 그리고 그 형체가 식별될 정도로 가까이 다가가자, 그는 그 형체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그 형체는 자신도, 그의 아이도 정말로 잘 아는, 또 사랑하는 존재였다.
"어서와요, 여보."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눈물을 보였다. 그리워하고, 또 그리워하던 그 사람. 자신과 아들을 지탱해주던 그 사람이 지금 바로 그의 눈 앞에 있었다.
"다녀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