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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인
어인들 중에는 물고기의 모습을 한 자와 인간의 모습을 한 자가 있다.
과연 이들은 인간인가, 아니면 동물인가?
-정보서 '어인에 대하여'中-
어인은 인간과 비슷하지만 손과 발에 갈퀴와 옆구리에 아가미가 있는 자들을 부르는 말이다. 인간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그들은 땅을 포함한 모든 것을 인간에게 빼앗겨 노예로 전락했다. 물론 쿠데타도 일으키고 폭동도 일으키는 등 독립을 위한 여러 노력을 시도했지만 더위에 익숙하지않은 어인들은 인간이 사는 곳의 더운 날씨로 인해 한번도 성공한 적이 없었다.
뷔렐이라는 어인의 아버지도 쿠데타에 참가했다가 화살에 맞아 죽은 수많은 어인들 중 하나였다. 그녀의 아버지때문에 그녀는 여러번 죽을 고비를 겪었다가 한명의 인간을 만나 목숨을 겨우 부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녀가 살고있는 집에는 많은 어인노예가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노예라기보다는 기숙사에서 사는 학생들처럼 자유롭고 화기애애했다. 그들이 이렇게 살 수 있는 것도 모두 그들을 사거나 거두어준 주인 덕분이었다.
그들의 주인은 꽤나 뚱뚱한 인간이었다. 얼굴에 난 팔자주름을 따라 수염기 길게 나있었고 항상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어인들을 대했다. 하지만 항상 웃으며 다니는 그를 보며 음흉한 미소를 짓고다닌다고 욕하는 어인들도 존재했다. 뷔렐은 그 생각을 해보지않은 것은 아니지만, 자신을 구해준 은인과 같은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하여 그 생각을 떨쳐버렸다.
주인은 이상하게도 헌납하다시피 그들을 챙겨주었다. 그들을 위해 어인들만 사는 대저택을 지어주었고 그 대저택 안에 커다란 호수도 만들어주었다. 그 뿐만 아니라 어인들이 부탁하는 것마다 무엇이든지 들어주어 어인들 대부분은 그를 좋아했다. 하지만 몇몇의 어인들만이 이 것을 어인들을 회유시켜 완전한 노예로 만들기 위한 계획이라며 욕을 해댔다. 뷔렐도 잘해주는 이유가 궁금하여 그에게 물었지만, 그는 그저 비밀이라고 할 뿐 대답해주지않았다.
물론 어인들을 아무것도 안시키고 그런 호의를 베푼 것은 아니였다. 몇몇을 데려다가 집안을 청소시키거나 건물을 짓게하고, 요리를 만들게하거나 자신을 지키는 호위병을 뽑는 등 잡일을 시켰다. 때로는 누군가를 죽이라고 하거나 밤시중을 들게하는 등, 심한 일도 시켰지만, 그것은 다른 주인을 가진 노예들도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아무멀도 하지않았다.
뷔렐은 이 때까지 밤시중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주인은 밤시중드는 사람을 뽑을 때 기준이 있었는데, 19세 미만은 절대로 건들지않았다. 홀해 18세인 그녀는 아직까지 일이라고는 요리나 청소밖에 해보지않은 어인이었다. 그러나 며칠있으면 1월 1일, 다음해로 넘어가 19세가 되어 밤시중을 들 수도 있기 때문에 약간 걱정이 있었다.
그녀는 식당에서 요리를 하며 옆에 있던 자신보다 2살 더 많은 어인여자인 디키에게 물었다.
"윌레(작가:어인들은 언니를 윌레라고 부른다), 밤시중 때 하는 것이 정확히 뭐죠?"
디키는 식칼로 오이를 썰고 은색 그릇에 넣었다.
"그건 왜 묻니?"
뷔렐은 오이가 들어있는 그릇에 식초와 설탕을 넣고 숫가락으로 휘휘 저으며 말했다.
"곧 있으면 저도 19살이잖아요. 이제 밤시중 들어갈 수 도 있을텐데 모르면 조금 그렇잖아요."
디키는 뷔렐의 말에 약간 흠칫하더니 이내 다시 요리를 하며 말했다.
"그냥 가서 해달라고 하는 것만 해주면 돼. 하지만 거부만은 하지마."
"왜요?"
"네가 이곳에 왔을 때 '루로'라고 갓 19살이 된 어인이 있었는데, 19세가 된 첫날 밤에 그아이가 밤시중으로 선택됐어. 아무것도 몰랐던 루로는 밤시중을 들 때 뭘할지 기대하면서 갔지만 주인의 부탁을 듣고 그걸 거부하다가 결국에는 매를 맞고 이 집에서 쫓겨났지."
뷔렐은 약간 겁이 나서 디키를 바라보며 물었다.
"도대체 어떤 부탁이길래 그러는 거에요?"
디키는 웃으며 그녀를 흘깃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다시 식칼로 불칸고기를 잘랐다.
"미안하지만 그건 알려줄 수 없어."
"왜요?"
"그냥 가서 듣는게 빨라. 그리고 결정하는 건 네몫이니까."
디키는 자른 고기를 기름이 둘러있는 프라이팬에 올려놓았다. 지글거리는 소리와 함께 맛있는 고기냄새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두꺼운 고기가 익는 모습을 보며 뷔렐은 아까 물어보았던 것을 잊고 침을 삼키며 바라보았다.
인간들의 땅 '하늘골'의 마을인 '화산花山'은 아름다운 풍경으로 유명한 마을이었다. 수백가지 종류의 꽃과 나무들이 자라있는 이 마을은 해마다 꽃축제를 벌였는데, 그때만 되면 아름다운 꽃들을 보기위해 여러 사람들이 몰려왔다. 그 때를 노려 화산의 장사꾼들은 가격을 올려 최대한의 이익을 얻었고, 거지들도 관광객들에게 많은 돈을 구걸받아 아쉬움없이 술을 퍼마셨다.
그날도 꽃축제의 날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화려한 옷차림으로 꽃축제를 즐기며 놀고있었지만, 한사람만은 축제를 즐기지 못하고 휘청거리며 걸어다녔다. 모자가 달린 검은색 망또를 두른 이 청년은 힘이 드는 지 나뭇가지를 지팡이삼아 걸어가고있었다. 숲이라도 갔다왔는 지 그의 망또에는 작은 나뭇가지나 나뭇잎이 붙어있었고, 알 수 없는 액체도 묻어 끈적끈적해보였다.
그가 향한 곳은 화산의 외곽에 있는 한 여관이었다. 꽤나 낡아보이는 여관 안에 들어간 청년은 여관 카운터로 향했다. 카운터에 있던 여관 주인은 손님이 들어오자 웃으며 보더니, 이내 그의 행색을 보고 표정을 찡그렸다.
"어서오슈"
청년은 여관 안을 둘러보았다. 여관 안에는 하루종일 작업에만 매진했던 남자들이 술을 마시고 수다를 떨며 모아두었던 스트레스를 모두 풀고있었고 축제를 구경왔다가 마을의 중앙 쪽 여관에 자리가 없어 이곳으로 온 듯 한 관광객들이 홀짝거리며 술을 마시고 있었다.
여관 주인은 그의 옷에 붙은 나무껍질과 액체를 보고 놀라며 물었다.
"혹시 고목인들의 땅에 갔다온거요?"
청년은 고개를 끄덕이고 주섬주섬 동전을 꺼내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주인은 동전을 받은 뒤, 뒤의 선반에서 열쇠를 하나 꺼내주었다. 그는 열쇠를 받고 계단 위로 올라가 방문을 열었다.
그의 이름은 비슬이었다. 21년 전 부랑자의 마을에서 연구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불을 내뿜는 검은 물에 대해 연구하고 있었는데, 항상 그에게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검은물을 발견하게되면 인간은 모든 종족을 앞지를 수 있을꺼야."
그러나 사람들은 세상에 존재하지않는 것을 연구한다며 돌을 던지고 욕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아버지는 꿋꿋이 연구를 하였지만, 심한 스트레스와 질병때문에 결국 38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 이후부터 그는 아버지의 연구를 이어받아 아버지가 원하던 검은물을 찾기위해 전 대륙을 여행하였다. 그가 고목인들의 땅에 갔던 이유도 바로 이때문이었다.
비슬은 방침대에 누워 주섬주섬 옷을 벗었다. 고목인들의 피로 얼룩져있던 망또를 바닥에 던지고 그는 침대 안으로 파고들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이 부드러운 침대의 감촉에 기분이 좋아진 그는 잠들기 전, 고목인들의 땅에서 들었던 말에 대해 생각했다. 처음으로 만난, 인간의 말을 할 줄 알았던 고목인, 그 고목인이 한 말이 마음에 걸렸다.
"아무도 가지도, 살지도 않는 땅에 네가 찾는 것이 있다."
그 말을 남긴 채 그 고목인은 다시 나무로 돌아가 잠에 들었다. 다시 깨우려고 불러도 보고 차기도 해봤지만, 그 고목인은 처음부터 나무였던 것 처럼 아무런 반응도 하지않았다. 비슬은 그 뜻이 뭘까 생각해봤지만, 너무 피곤했는 지 금방 잠에 빠져들었다.
다음 날, 그는 해도 뜨지않은 새벽에 일어나 벗어두었던 망또를 다시 입고 1층으로 내려갔다. 1층에서는 주인이 테이블을 닦으며 여관을 열 준비를 하고있었다. 비슬은 주인에게 다가가 물었다.
"이 대륙에 아무도 살지않는 곳이 있습니까?"
주인은 찡그린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건 왜 물어보는거요?"
"묻는 말에만 대답해주십시요."
그의 말에 주인은 표정을 험악하게 만들고 짜증나는 듯 비슬을 바라봤지만, 이내 한숨을 쉬고 다시 테이블을 닦기 시작했다.
"인간의 땅 북동쪽 경계선을 넘으면 사막이 있소. 사람들은 그 곳을 필사의 사막이라고 부르지."
"필사의 사막이요?"
"그래, 그 곳에 가는 생명체들은 모두 죽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는않아."
"왜죠?"
"그 곳에도 생명체가 살거든. 그저 인간들이나 어인, 고목인들이 살지 못한다고 붙여진 이름같은데, 생명체가 살면 필사는 아니지않아?"
비슬은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한 뒤, 여관의 출구로 향했다. 그 순간, 주인은 큰소리로 비슬을 향해 외쳤다.
"가는 건 별로 추천해주고싶지는 않지만, 만약 가게된다면 솔림마을에서 봉우리말 한 필정도는 사가시오. 필요할 테니까."
그의 말을 들었는 지 비슬은 잠깐 멈추더니 고개를 끄덕이고 밖으로 나갔다.
어인의 푸른 피가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그 피는 바닥에 쓰러져있는 어인여자의 볼에서 난 것이었고 그 어인여자의 앞에는 뚱뚱하고 못생긴 남자가 화난 표정을 짓고 그녀를 바라보고있었다.
"뷔렐, 내 말을 거역하면 어떻게 되는지 못들었나?"
그녀는 아무말도 못하고 눈물을 흘리며 바닥만 바라보았다. 주인은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주변에 있는 물건들을 바닥에 던져 부시더니 밖에 있는 어인을 불렀다.
"후룸, 저 년을 내 땅에서 쫓아내라!"
후룸은 조용히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녀에게 다가가 일으켜세우고 함께 밖으로 나갔다.
그녀는 어딘지 모르는 숲에 내동댕이쳐졌다. 한번도 와보지않았던 이 숲에서 그녀는 길잃은 어린양처럼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그러나 걸으면 걸을수록 숲 안으로 깊숙히 들어가는 느낌만 날 뿐, 그녀가 원하는 출구는 나오지않았다. 그녀는 나무에 기대고 주저앉았다. 잠시 후, 차가운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지더니 이내 소나기가 주룩 쏟아졌다. 어딘가로 들어가 비를 피하고 싶었지만, 그녀는 비를 피할 집 뿐만 아니라 돌아갈 곳도 존재하지않았다.
"어째서....."
빗방울인지 눈물인지 모르는 것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돌아갈 곳이 없다는 생각과 쏟아지는 비로 인해 그녀의 서러움은 더욱 커져 결국 참을 수 없을 지경까지 이르렀다. 그녀는 입을 벌리고 큰소리로 울었다. 누구에게든 기대고 싶었지만, 그녀의 부모님은 이미 죽었고 친구들은 존재하지않았다.
그녀는 외톨이였다.
한동안 울던 그녀가 우는 것을 멈추고 정신을 차렸을 때 쯤, 시간은 이미 밤이 되어 세상은 어둠 속에 빠져있었다. 그녀는 빨리 이 숲을 빠져나가야겠다는 생각에 다시한번 일어나 걸어갔다. 그 때, 그녀의 주변 가까운 곳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인간의 발자국 소리보다 큰 이 소리는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손으로 입을 막고 최대한 소리가 나지않도록 천천히 뒤로 움직였다. 그녀가 발을 내딛자 '탁'소리가 나며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그 순간, 발자국 소리가 잠깐 멈추더니, 그녀가 있는 방향으로 빠르게 달려왔다. 달려오는 소리가 들리지마자 그녀도 그 발자국 소리가 들리는 곳의 반대방향으로 뛰었다. 떨리는 다리를 겨우 이끌고 뛰었지만, 그 발자국소리는 멀어지기는 커녕 점점더 가까워졌다. 그녀가 거의따라잡혔을 무렵, 무언가가 그녀가 뛰어가는 방향에서 뛰쳐나왔다. 뷔렐은 깜짝놀라 넘어졌고, 고개를 올려 그 것의 모습을 보았다. 숲에서 뛰쳐나온 것은 모자가 달린 검은색 망또를 쓴 인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