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ass-10-
그 이후로 집무실은 한동안 조용해졌다. 모두 서류작업을 하는데 집중했는지 종이넘기는 소리와 펜을 움직이는 소리밖에 나지않았다.
이 고요한 정적을 먼저 깬 사람은 로빈. 그가 작업을 하면서 테너에게 물었다.
"테너, 나머지는 다 어디갔어?"
테너는 펜을 멈추고 쇼파에 등을 기대며 미간을 누르며 대답했다.
"어.... 프렌시아는 잘 모르겠고, 헬라는....아, 이틀 전인가 3일 전에 영주님께 보고하고 부모님 뵈러 고향으로 갔습니다."
"헬라는 그렇다치고....."
로빈은 책상에 펜을 내려놓고 다음 종이를 올려놓았다. 그리고 의자에 등을 기대 양손으로 얼굴을 한번 훑어내렸다.
"프렌시아는 안온지 며칠됐어?"
"오늘까지 하면 4일째요."
테너는 다시 펜을 들고 서류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로빈은 한숨을 쉬고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자신의 등 뒤에 있는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밖은 아직도 어둡게 드리워진 구름에서 내리는 빗방울이 바닥에 떨어지고있었다. 조금만 더 있으면 번개까지 칠 것 같았다.
"걱정되세요?"
테너가 물었다. 로빈은 콧방귀를 끼며 대답했다.
"걱정되기는."
이 때까지 거의 지각한 적이 없었던 남자였다. 무슨 일이 있어 지각하게 되면 어떠한 연락망을 동원해서라도 그에게 보고했던 프렌시아. 그런 그가 3일동안 오지않았다는 것은 집무실에 있는 모두에게 있어서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로빈은 문 앞으로 걸어가 옷걸이에 걸어놓은 로브를 들고 말했다.
"나 나갔다올테니까 내 책상 위에 있는 것까지 다 해놔."
그가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뒤에서 탄성이 들려왔다. 로빈은 화가 난 듯 표정을 찡그리며 뒤를 돌아 그들을 보았다. 그러자, 탄성이 일순간 사라졌다.
그는 한숨을 쉬며 문을 열려고했다. 그 순간, 밖에서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브레미아 로빈테스님 계십니까?"
젊은 여성의 목소리. 로빈이 문을 열고 밖을 보았다. 그러자, 문 앞에는 주황색의 두꺼운 원피스에 흰색의 앞치마를 두르고 머리에는 흰색 두건을 쓴 하녀 한 명이 고개를 숙이고있었다.
"무슨일이지?"
로빈이 묻자, 하녀는 조곤조곤하게 대답했다.
"영주님께서 곧 회의를 시작하신다고 회의장으로 오라고하십니다."
로빈은 혀를 한 번 찼다. 그리고 말했다.
"알았다. 준비하고 바로 간다고 전해드려라."
"예."
하녀는 인사를 하고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그는 다시 문을 닫고 테너를 불렀다.
"테너!"
"네."
열심히 서류작업을 하던 테너가 고개를 올리고 로빈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로빈은 테너에게 오라고 손가락으로 손짓한 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성은 유사시에 병영에서 바로 성으로 출동해야했기에 걸어서 5분정도 걸리는, 그리 멀지않은 곳에 있었다.
로빈은 이 5분이라는 짧은 시간동안 생각에 잠겼다. 도대체 영주님께서 휴가중인 자신을 왜 부른 것일까.
그의 옆에 있던 테너가 그에게 물었다.
"영주님께서 왜 부르신거에요?"
"글쎄."
영주님께서 임명한 기사라면 물론 회의에 참석해야하는 것은 맞지만, 원래라면 휴가를 나간 사람을 제외하고 회의를 하기때문에 휴가를 나갔던 자신이 불린 것은 꽤 이례적인 일이었다.
성의 문 앞에 다다르자, 대기하고 있던 하녀 몇 명이 깨끗한 물이 담긴 대야와 흰색으로 되어있는 천을 가지고 나왔다. 그리고 로빈테스와 테너의 발 밑에 있는 진흙을 털고 신발 밑부분만 물에 담가 흙을 빼내고 솔로 닦았다.
신발 청소가 끝나자,로빈은 하녀에게 자신의 갈색 로브를 건네주고 안으로 들어갔고 하녀들이 다시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몇 명은 흙으로 더러워진 물을 밖에 버리고 새로 뜨러 향했고, 몇 명은 누가 오는지 밖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회의장으로 가는 성의 복도. 바닥에는 붉은색 양털로 이루어진, 모서리에는 금빛으로 빛나는 실이 빙글빙글 꼬여 올라가는 모양으로 자수된 카펫이 깔려있었고, 벽에는 여러 장식품들이 걸려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비싸보이는 장식품들, 각종 그림들과 선반 위에 올려져있는 항아리, 화려하게 치장된 칼들이 벽에 걸려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마다 꽃모양 유리로 감싸져있는 촛불이 화려하게 빛내며 주변을 밝히고 있었다.
테너는 회의장을 향해 걸어가며 궁금한 듯한 얼굴로 로빈에게 물었다.
"도대체 무슨일일까요?"
"나도 모르지."
영주는 그와 동급인 기사 셀셰인를 시켜 그를 성으로 불러들였다. 그 것만 봐도 로빈은 이번 회의가 얼마나 중요한 사안에 대해 회의하는 것인지 잘 알 수 있었다.
회의장의 문 앞. 그는 자신의 키보다 큰 나무로 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처음으로 눈에 보인 것은 많은 인원을 앉힐수 있게끔 세로로 길게 만든 탁자였다. 그리고 그 탁자의 맨 끝에 앉아있는 한 남성.
와인같은 흑적빛깔의 짧은 머리에 강한 의지와 자신감이 느껴지는 눈의 바로 밑에는 화살처럼 날카로운 코가 그의 카리스마를 한층 더하는 듯 뽐내고있었고, 그 밑에는 턱에만 조금 길게 기른 수염이 촘촘하게 나있었다. 그리고, 몸에 꽉 낀 베이지색 튜닉에서 보이는 근육들이 그가 얼마나 강인한 남자인지 보여주었다.
"어서오게,로빈!"
끝에 앉아있던 남성이 미소를 지으며 그를 환영했다. 로빈은 고개를 숙이고 인사했다.
"기사 로빈, 영주님을 뵙습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그런 격식인사는 집어치우자고."
그리고 그에게 악수를 권했다. 로빈은 양손으로 그의 손을 붙잡고 악수했다. 영주는 로빈을 그의 바로 오른쪽 자리로 끌고가 앉혔다. 그리고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휴가 중인데 불러서 미안하네."
"아닙니다."
"솔직히 나는 휴가나갔던 자네를 별로 부르고싶지는 않았는데말이야..... 상황이 상황인지라..... 자네가 조금 이해해주게."
로빈은 고개를 끄덕이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영주는 자신을 제일 먼저 불렀는지 다른 자리는 아직 비어있었고, 안에 있는 사람이라고는 로빈과 함께 온 테너와 턱시도를 입은 노인 한 명 뿐이었다.
영주는 자리에서 일어나 테너에게도 악수를 권했다. 그러자, 테너는 미소를 짓고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며 손을 잡았다.
얼마 가지않아 사람들이 점점 모이기 시작했다. 여관에서 그를 불렀던 기사 셀셰인부터 시작해 경비단장인 창병 멜타폴, 왕실 마법사인 노인 데기날 등 여러명의 사람들이 차례차례로 들어왔다. 그리고 얼마 가지않아 원래라면 있어서는 안될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 사람은 로빈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
"토미?"
토미는 로빈을 보고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물론 어렸을 적에 토미는 왕실 마법사였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왕실 마법사를 그만두었기 때문에 회의에는 불러선 안될 사람이었다. 그런데 여기에는 왜 온 것일까.
그의 마음을 꿰뚫어보기라도 한 듯, 옆에 있던 영주가 그를 보며 말했다.
"긴급 비상소집이라서 불렀다네."
로빈이 깜짝 놀라 영주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시간이 지나자, 한 명을 제외한 성에 있던 주요 인사들이 모두 회의장으로 들어왔다. 그러자, 영주가 손으로 탁자를 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큰소리로 말했다.
"모두 모였군. 그럼 회의를 시작하지."
그의 말이 시작하기 무섭게 웅성거리던 회의장이 아무도 없는 듯 조용해졌다. 영주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모두들 내가 보낸 긴급 비상소집령 편지는 받았을꺼야. 그 안에는 위험한 일 때문이라고 적혀있었을 것이고."
그는 자신의 주머니에서 편지 하나를 꺼내 보여주었다. 그 편지는 로빈도 가지고있는 긴급 비상소집명령 편지였다.
영주는 그 편지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 말했다.
"아마 여기서 내가 무엇때문에 불렀는 지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을꺼야. 이 일은 밖으로 새나가면 안되거든."
그는 뒷짐을 지고 천천히 걸어다녔다.
"잡설은 그만하고, 내가 휴가였던 사람까지 불러서 회의를 하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그는 다시 자리에 앉아 팔꿈치를 탁자위에 올려 양손을 깍지를 껴 잡고 입을 기대었다. 그리고 심각한 얼굴을 지으며 말했다.
"마물침공때문이다."
"마물침공 말씀이십니까?"
데기날이 길게 난 흰색의 수염을 매만지며 물었다. 그러자, 그의 옆에 있던 멜타폴이 신이 난듯 웃으며 말했다.
"드디어 마물 토벌 출전입니까?! 이거 기대되는데요?"
그들의 반응에 영주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이번 침공은 우리쪽에서 치는게 아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그의 옆에 있던 로빈이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원래 매년 이 시기가 올 때면 알 수 없는 이유로 마물이 불어났기때문에 마물의 수를 줄이기 위해 인간쪽에서 출진하는 것이 관례였다.
"치는 것이 아니란 것은....."
셀셰인이 생각에 잠겨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이내 무언가 생각났는지 놀라는 표정으로 영주를 보았다.
"말도 안됍니다!"
셀셰인이 믿을 수 없다는 듯 큰소리로 영주에게 말했다. 잠시 후, 자신이 영주에게 실례를 범했다는 것을 알고 고개를 숙여 사죄하고 말을 이었다.
"마물들은 지능이 낮기때문에 다른 짐승들처럼 같은 종족끼리만 무리생활을 하거나 따로 혼자 다니는데, 마물들이 단체로 모여서 인간을 침공한다는 것입니까?"
영주는 셀셰인이 포인트를 잘 집었다는 듯 중지와 엄지를 마찰시켜 '딱'소리를 낸 다음 손가락으로 셀셰인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도 그 부분이 이해가 가지않는단말이야."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말했다.
"작년까지만 해도 마물들이 모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뿔뿔이 흩어져 우리들이 처리하기가 꽤 까다로웠지."
그는 그의 뒤에 서있던 턱시도를 입은 노인에게 오라는 손짓을 했다. 그러자, 노인은 가슴주머니에서 종이를 몇 장 꺼내더니 라인에 하나씩 배치하기 시작했다. 종이에는 이 주변의 지리가 상세하게 그려져있었고 도시의 얼마 떨어져있지않은 곳에 자그마한 원 하나가 그려져있었다.
"지도에 동그라미 쳐진 곳이 보이지? 그 곳이 지금 마물들이 모이고있는 장소다."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멜타폴이 놀라며 영주를 보았다.
"여기는 도시와 거의 근접한 곳이 아닙니까?"
"그렇지. 아마 일주일 전부터 계속 모였던 것 같으니까 지금쯤이면 꽤나 거대한 대군이 되어있을꺼야."
"어째서 초기에 진압을 하지 않은 것입니까?!"
셀셰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항의하듯 말했다. 그러자, 영주는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셀셰인, 네 말이 무슨뜻인지는 알겠지만, 그 녀석들이 모이는 것을 저지한다고 하더라도, 한 번 생겼던 일이 두 번 생기지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잖아?"
"그렇긴 하지만....."
영주는 셀셰인에게 다가가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내가 그 생각을 안해본 것은 아니야. 그런데 지금은 마물이 불어나는 시기야. 이 녀석들이 따로 나뉘어서 불어나는 것보다는 전부 모인 것을 한 번에 처리하는 편이 빠르니까 내가 가만히 내버려둔거야."
"아..... 네."
셀셰인이 자리에 앉자, 그는 다시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그리고 토미를 가리키며 말했다.
"내가 전(前)왕궁 마법사인 토미를 부른 이유도 이때문이다. 토미의 범위마법은 이번 작전에 있어서 꼭 필요하다."
그 말에 데기날은 눈썹을 살짝 올리더니 무언가 마음에 안든다는 듯 한 말투로 영주에게 말했다.
"마법사라면 현(現)왕실 마법사인 제가 있는데 어째서 저런 어린아이를 부르신 것입니까?"
"마법사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니까말이야."
데기날은 그의 대답에도 아직 마음이 내키지않는 듯 토미를 보며 연신 헛기침을 했다. 그 모습에 토미는 약간 시무룩해진 표정으로 지도만 바라보았다.
잠시 후, 누군가가 회의장의 문을 두드렸다. 그 소리에 영주의 옆에 있던 노인이 천천히 걸어가 문 밖을 내다보았고, 밖에 있는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더니 영주에게 돌아와 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그러자, 영주가 심각한 표정으로 그들을 보며 말했다.
"지금 마물들이 도시를 향해 출발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아마 빠르면 내일, 늦으면 모레에 도시의 문 앞까지 도착할꺼라는군."
멜타폴이 꽤나 당황한듯 뒷머리를 긁으며 물었다.
"그렇게 빨리 도착하는겁니까?"
"출발한 것은 오늘 새벽이라고 하더군. 정찰병이 말타고 오는데 7시간정도 걸렸으니 대군의 마물들이 오는데는 아마 그정도가 걸릴 것 같다."
"영주님, 지금 저희쪽 병력은 어느정도 있습니까?"
로빈이 팔짱을 끼고 진지한 표정으로 영주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영주는 잔뜩 짜증나 얼굴이 찡그려진 채로 대답했다.
"그게 문제야. 지금 성 안에는 병사가 겨우 500명 밖에 없어. 그렇다고 대대적인 공고를 해서 사람들을 불러모아봤자 훈련도 되지않은 사람들은 그저 개죽음밖에 되지않아. 그렇게 되지않으려면 적어도 평범한 모험가정도는 고용해야하는데, 모험가를 고용하기에는 돈이 너무 쪼달려."
로빈이 턱을 매만지며 그의 말을 경청했다. 영주는 한숨을 쉰 후에 계속 말을 이었다.
"일단 옆 도시 페슬라의 영주에게 원군 좀 보내달라고 부탁은 했지만..... 올지 안올지는 모르겠어."
그의 말이 끝나자, 토미가 영주에게 물었다.
"일단 모험가들에게 부탁해보는게 어때요?"
"부탁한들 그 누가 아무런 보상없이 사지로 가겠어?"
영주가 고개를 저으며 말하자, 토미 역시 그의 말에 동의하지않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모험가분들은 도와주실꺼에요."
"어떻게 그리 확답하지?"
토미는 지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 곳은 지리상으로 모험가들에게 있어서 아주 좋은 자리에 위치하고있어요. 이 도시가 없다고 쳤을 때 이전 도시부터 다음 도시까지 거리는 하루하고도 반이 걸리고, 또 이 근처에는 약한 마물들이 나오기 때문에 막 입문한 모험가들은 이 곳에서 한동안 머물면서 자신의 실력을 쌓고있어요. 이 마을이 없어진다면 모험가들 입장에서는 꽤나 귀찮은 일이 되는거죠."
"호오, 그렇군."
영주가 수염을 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잠깐동안의 정적. 잠시 후, 영주는 양손으로 책상을 치며 일어나 말했다.
"일단 오늘의 회의는 여기서 끝이다. 그리고 각자 알고있는 모험가들 중에 괜찮은 사람들이 있다면 뽑아서 데려오고. 그리고 벨메르."
그의 부름에 옆에 있던 턱시도를 입은 노인으 고개를 숙이며 앞으로 나왔다.
"너는 모든 모험가를 광장의 단상 앞에 모아라. 오늘 오후 4시에 내가 모험가들에게 한 번 말해보지."
벨메르는 고개를 끄덕이고 천천히 밖으로 걸어나갔다. 그리고 영주의 마지막 외침이 방 안에 퍼졌다.
"자, 그럼 모두 해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