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어느 새 아무도 없는 빈 공간이 되어버렸다. 흰색의 페인트가 하늘과 땅을 대신해 지구를 덮고있었고, 그에 따라 세상에 혼자남은 그의 몸도 새하얗게 물들어있었다.
"여기가 어디지?"
그는 아무 것도 기억하지못했다. 이 곳이 어디인지, 자신이 살아있는 지, 죽었는 지도 모르고 멍하니 하얗게 변해버린 하늘을 보았다.
"원래부터 하늘이 하얬나?"
원래부터 하늘이 하얬는 지, 파랬는 지도 기억나지않는 그는 머리를 이미 하얗게 변한 손으로 하얘진 머리를 부여잡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기억나라고 머리를 때려보고 쥐어뜯어봤지만, 원래부터 머리 속에는 아무 것도 들어있지않았던 것처럼 그 무엇도 기억할 수 없었다.
그의 눈에서 페인트같은 흰색 액체가 바닥에 떨어졌다.
"왜 울고있어?"
그의 앞에서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려 앞을 보았다. 그 곳에는 수염을 조금 기른 한 청년이 그를 보며 물었다. 신기하게도 아무 색깔이 없는 세상에서 그 혼자만 색깔을 가지고있었다. 그의 상의는 땅처럼 단단할 것 같은 짙은 갈색이었고, 하의는 바다처럼 잔잔할 것 같은 푸른색이었다.
그는 남자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너는 누구야?"
남자는 뒤통수를 긁으며 말했다.
"음, 뭐라고 말해야할까....." 그는 잠깐동안 고민하더니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세상'이라고 생각하면 될꺼야."
알 수 없는 청년의 말에 그는 고개를 한번 갸우뚱거렸다. 그러자, 남자는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자, 가자. 널 기다리고있는 사람이 있어."
그는 남자의 손을 잡고 천천히 일어났다. 그가 일어나자, 남자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어딘가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는 그의 뒤를 따라가며 입을 열었다.
"여기는 어디야?"
그의 물음에, 남자는 혀를 한번 차고 그에게 말했다.
"여기는 흔히들 말하는 '저세상'이다."
"저세상?"
"그래, 죽은 자들이 오는 곳."
남자의 말을 듣고 그는 잠깐 머뭇거리며 작은소리로 물었다.
"나는..... 죽은거야?"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아무것도 기억나지않았기때문에 죽었다는 것을 알지못했다. 그러나,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너는 한 생명을 구하려다 차에 치였다."
남자는 그가 죽은 상황을 말했다. 생각도 나지않는 그 생명이라는 것을 위해 죽었다는 것을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생명이라는 것을 구하기 위해 죽었다는거야?"
"그래."
그는 주머니에서 손을 빼고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어째서?"
그의 질문이 이상했는 지, 그는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고 한숨을 쉬었다.
"기억이 완전히 사라졌나보군."
남자는 그의 머리에 손을 대었다. 그러자, 어떤 장면이 눈 앞에 보이기 시작했다. 이 곳과는 다르게 색깔이 있는 세상에서 남자보다 조금 작은 한 소년이 그의 눈 앞에 있었다. 그 소년은 얇은 종이가 겹쳐져있는 무언가를 눈으로 훑으며 앞으로 가고있었다. 눈 앞에는 꽤나 위험한 고철들이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있었고, 얼마 지나지않으면 그는 그 고철에게 치일 것 같았다.
'앞을 봐...."
그는 작은 소리로 그 소년에게 말했다. 그러나, 그 소년에게는 들리지않는 지 소년은 계속해서 눈으로 종이를 훑으며 걸었다. 소년의 그 고철들의 도로에 다다르기 전, 소년보다 더 어린 한 아이가 그를 치고 달려갔다. 초록색으로 반짝반짝 빛나던 불이 그 소년이 도로로 들어가기 무섭게 붉은색으로 바뀌었다. 그 순간, 커다란 소리가 그의 귀에 들려왔다. 고철에서 나는 소리였다. 고철은 그 아이를 놀리기라도 하는 듯 빠른속도로 달려오면서 그에게 커다란 소리를 질러댔다. 그러자, 아이는 그 고철을 보고 움직임이 멈춰버렸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고철덩어리가 그 아이를 칠 정도로 가까워졌을 무렵, 아까 종이를 읽으며 걸어오던 소년이 아이를 안아 자신이 달려온 방향쪽으로 집어 던졌다.
"아....안돼!"
그는 소년에게 들리지도 않을 외침을 계속 지르며 소년에게 달려갔다. 그러나, 소년과 고철은 그를 놀리는 듯 점점 멀어졌다. 그리고 잠시 후에, 그 고철은 소년을 집어삼켰다.
"이제 알겠어?"
남자가 천천히 그의 머리에서 손을 떼었다. 그는 남자가 손을 떼기 무섭게 신음소리를 내며 눈과 입에서 흰색 액체를 쏟아내었다. 그는 아무리 뱉어내도 메스꺼워지는 속을 부여잡고 남자에게 물었다.
"어째서..... 이런 장면을 보여주시는거죠?"
남자는 다시 뒤로 돌아 천천히 앞으로 향했다.
"이게 바로 네가 죽기 전의 상황이다."
그는 크게 놀라며 다시한번 올라오는 메스꺼움을 밖으로 뱉어냈다. 흰색 액체가 철퍽거리며 바닥에 스며들었다. 한동안 메스꺼움을 뱉어내던 그는 더이상 나오지않자 입과 배를 부여잡고 천천히 일어났다. 어느 새 같이 있던 남자는 제자리에 앉아 턱을 괴고 그의 모습을 보고있었다.
"괜찮아졌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남자에게 물었다.
"저게 정말로 제 마지막 모습인가요?"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가던길을 재촉했다.
"늦었으니까 궁금한 건 가면서 물어봐라."
그는 걸어가는 남자를 뒤따라갔다.
그가 아무말이 없자, 남자는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눈,코,입도 없이 하얗게 변색되어버린 그의 얼굴에서 알 수 없는 액체가 뚝 뚝 떨어졌다. 액체가 바닥에 떨어지자, 아무것도 없이 새하얬던 바닥에 초록색이 보이기 시작했다.
남자는 울고있는 그를 보고 아무런 말 없이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않자, 그는 남자에게 물었다.
"어떻게 됐죠?"
"뭐가?"
"그 아이말이에요."
"어떻게 됐을 것 같아?"
그는 희망을 안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살....았겠죠?"
"나도 잘 몰라."
남자의 대답에 시무룩해진 그를 보고, 남자는 입을 열었다.
"내가 모른다는 것은 아직 그 아이가 이 곳에 오지않았다는거야."
남자의 한마디를 듣고, 다행이 그 아이를 지켜내고 죽었다는 기쁨과 알 수 없는 허무함이 그의 마음에 들어와 그는 소리내어 구슬피 울기 시작했다. 그에게서 떨어지는 눈물들이 바닥에 닿기 무섭게 하얀색은 사라지고 바닥과 하늘이 씻겨내리듯 자신의 색깔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남자는 그 모습을 보고 계속해서 앞으로 걸어갔다.
잠시 후, 그는 다시한번 남자에게 질문했다.
"저때문에 슬퍼하는 사람은 없었나요?"
"있었지."
남자의 대답에, 그는 불안한 듯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누구....죠?"
이번에도 남자는 몸을 돌려 그에게 다가와 머리에 손을 대었다. 아까처럼 그의 눈 앞에 알 수 없는 풍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꽃이 만발해있는 책상의 위에 한 소년의 얼굴이 담긴 액자 하나가 놓여있었다. 그리고 그 액자의 앞에 두명의 늙은 남녀가 투명한 눈물을 흘리며 통곡하고있었다. 그들을 보기가 무섭게 그의 마음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그들의 얼굴에서 떨어지는 눈물처럼, 그의 얼굴에서도 하얀색 액체가 떨어져내렸다. 그는 그들이 누구인지도알지 못했지만, 이상하게도 그들이 우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찢어지듯 아파왔다. 마음이라는 것이 몸의 내부에 있었다면, 그는 칼로 살을 도려내 그 마음을 떼어버리고싶었다.
남자는 천천히 그의 머리에서 손을 떼었다. 그러자, 그는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고, 그의 얼굴에서는 하얀색 액체들이 굳지않은 페인트가 빗방울에 맞아 흘러내리는 것처럼 떨어졌다. 그 액체들이 떨어질 때마다, 그의 얼굴에 살색빛이 감돌았고, 바닥에 떨어진 흰색 액체들은 세상을 푸른빛으로 물들였다. 남자는 아까처럼 자리에 앉아 턱을 괴고 그를 바라보았다.
오랜시간동안, 그는 마음이 찢어진 듯 그저 울기만했다. 어째서인지 알지도 못한 채, 그들을 보고 아파오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울어도 울어도 아파오는 마음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않았고, 그는 오랜시간이 지난 후에야 겨우 눈물을 멈추고 그에게 물었다.
"저에게... 보여준 사람들은.... 누구죠?"
"누구일 것 같아?"
그는 금방이라도 다시 눈물이 나올 것 같아 고개를 떨구고 남자에게 말했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네 부모님이야."
"부모님....?"
"그래."
"부모님이 뭐하는 사람들이죠?"
"너에게 생명을 주신 분들이야."
"생....명?"
"그래, 널 세상에서 살 수 있게 만들어주신 분들이지."
그는 가슴을 부여잡았다. 아파오는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노력해도, 아파오는 마음은 가라앉을 생각을 하지않았다.
남자는 다시 돌아보고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아픈마음을 부여잡고 그는 남자를 따라 계속 걸어가며 하얀 액체를 떨어뜨렸다.
얼마 지나지않아, 남자는 제자리에 멈추고 그에게 말했다.
"다왔다."
한동안 울던 그는 고개를 들어 주변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주변은 남자의 옷처럼 초록빛과 푸른빛이 넘쳐나고있었고, 그의 몸 역시 색깔을 되찾아 빛을 내고있었다.
남자는 뒤를 돌아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네가 있을 곳은 여기가 아니야."
남자의 등 뒤에는 커다란 배 한척이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둥둥 떠있었다.
"저 배는 뭐에요?"
남자는 이 때까지 보여주지않았던 미소를 보여주며 말했다.
"이제부터 네가 지낼 곳으로 데려갈 배다."
"배?"
"그래, 배."
남자는 배의 앞부분을 쓰다듬으며 그에게 말했다.
"이 배를 타고 건너가면, 그 앞에는 너를 기다리고있는 사람들이 있을꺼야."
그는 자신없는 작은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저를 기다리고있는 사람들이 있나요?"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누구든지 죽게되면 누군가는 반드시 도착한 너를 기다리고있어. 그게 너를 사랑했던 여자일지, 아니면 너와 가장 친했던 친구인지는 도착하기 전까지는 몰라."
남자가 배의 앞부분을 강하게 치자, 위에서 사다리가 하나 내려왔다.
"자, 이제 갈 시간이야."
그는 그 사다리를 잡을지,말지 망설였다. 남자가 그렇게 말을 했고, 또 기억은 나지않지만, 이 때까지 친했던 친구들은 모두 살아있었고, 주변에 자신을 좋아했던 사람들 중에는 죽은 사람은 한명도 있지않았다. 그가 망설이고있자, 남자는 그의 손을 잡아당겨 사다리에 갖다대었다.
"이제 헤어질 시간이야."
그는 눈 앞에 있는 남자를 보며 무언가를 물어보려고 입을 열었다. 그러나, 어느샌가 그 남자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있었고, 그는 배의 위에 올라와있었다.
배가 반대편으로 지나갈 수록 그의 머릿 속에 기억들이 하나 둘 들어오기 시작했다. 자신이 태어났던 시절부터 시작해 행복했던 모든 순간들이 빠르게 머리 속으로 흡수되었다. 그리고 그의 머리 속에 행복이 가득 채워질 때 쯤, 땅의 반대편에 도착했다.
그는 긴장을 하며 바닥에 사다리를 내리고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제발 누군가는 나와있기를 빌었다. 그의 발이 땅에 닿았을 때, 그의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서 와."
그는 아파오는 마음때문에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그 목소리의 주인을 보면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다른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가 왔는데 왜 돌아보지않니?"
그는 찢어진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 큰소리로 흐느끼며 목소리의 주인들에게 달려가 안겼다. 그러자, 따스한 손길이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서오렴, 아가야."
어렸을 때부터 죽기 직전까지 자신을 그렇게 불렀던 두사람, 그는 고개를 올려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 곳에는 남자가 보여준 풍경에 있던 두사람이 미소를 지으며 그를 보고있었다. 다른점이 있다면, 그 풍경에서와는 다르게 주름이 좀 더 많았고, 머리는 완전히 세어 흰색으로 바뀌어있었다.
그는 아이처럼 그저 그들의 품에 안겨 울기만 했다. 잠시 후, 그들은 진정이 되어 웃는 그를 데리고 천천히 푸른 초원을 향해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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