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색의 물방울이 바닥으로 뚝 뚝 떨어진다. 비라면 붉지는 않을텐데, 걸어오는 그의 손에서는 붉은색의 빗방울이 계속 떨어진다. 갈색의 남루한 로브를 뒤집어쓴 그의 허리에는 작디 작은 하얀색 검 하나가 눈에 띄었다. 검이라면 원래 회색빛이 돌텐데, 이상하게도 그의 허리에 있는 검은 새하얀 눈 그 자체인 것처럼 하얗게 빛이 났다.
그가 손을 들어올려 어딘가에 있는 문을 열었다. 붉은색의 떨어지는 빗방울이 뭍으며 문이 기괴한 소리를 내며 힘없이 밀려났다. 그는 문 안으로 들어갔다.
문의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대신 탁자가 그를 기다린 듯 수북한 먼지의 무게를 버티며 자리에 놓여있었다. 그는 의자의 위에 있는 먼지를 걷어내고 젖은 로브를 벗어 위에 올려놓았다. 물을 가득 머금은 로브가 의자에 힘없이 축 늘어졌다.
그는 방 안에서 하나의 액자를 발견했다. 한 여성이 그려져있는 액자, 그리고 그 옆에 놓여있는 그의 손바닥만한 상자 하나. 그는 상자를 열었다. 그리고 그 상자의 옆에 달려있는 손잡이를 돌렸다. 드르륵하는 소리가 집 안에 울려퍼졌다. 상자의 손잡이를 계속 돌리던 그는 손잡이가 무언가에 걸리자 손잡이를 놓고 상자를 다시 제자리에 두었다. 그러자 아름다운 선율이 힘겹게 목소리를 내었다. 몇몇구간에서 조금씩 끊겨들렸지만, 그 상자는 충분히 아름다운 소리를 그에게 뽐내고있었다.
그는 다시 방 밖으로 나갔다. 몇 년간 아무도 관리하지않아 바닥까지 수북히 쌓여있는 먼지. 그는 집의 오른편에 있는 수납장을 열었다. 그 안에는 언제 먹었는 지 반 쯤 사라져있는 음료수 하나가 놓여있었다. 그는 음료수를 꺼내 병의 뚜껑을 열었다. 호리병처럼 생긴 유리병 안에 담겨있는 음료수는 이미 굳었는지 나오지않았다.
소년시절에 자주 마셨던 이 음료수가 이렇게나 마시고싶은데, 그 음료수는 그의 굳은 마음처럼 더 이상 나오지않았다. 가만히 그 음료수병을 보고있던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아직도 상자에서는 힘겹게나마 선율이 흘러나오고있었다. 그는 상자가 있는 선반의 오른쪽에 있는 나무로 된 침대에 누웠다. 먼지때문에 푹신함이 느껴지기는 했지만, 그것도 잠깐. 먼지는 물에 젖은 그의 몸에 눌려 푹신함은 금새 사라져버렸다. 그는 허리에 차고있던 흰색의 검을 선반에 세워 기대어놓았다. 새하얀색의 검에서 드라이아이스와 같은 김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리고 얼마안가 방 안은 온도가 급격하게 내려가 추워졌다. 비에 젖은 몸인데 감기에 걸리지는 않을까. 그런 걱정은 한 번도 해본적이 없었다. 그에게는 온기란 것이 몸에서 나오지않았고, 오로지 냉기만이 흘러내렸다. 마치 죽은 사람처럼 새하얀 피부를 가진 남자.
집 안에 있는 수증기들이 점점 얼며 벽에 서리가 끼기 시작했다. 먼지는 이미 얼어붙어 딱딱한 벽돌처럼 되어있었고 굳었던 음료수조차 다시 얼어 팽창하며 유리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는 이마에 손을 얹었다. 예전에는 눕기만 하면 바로 잠이 왔던 침대였지만, 지금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기억 속에는 한 여성이 어린 자신을 보듬어주고있었지만, 이미 그녀는 이 곳, 아니 세상에 없어진 지 오래. 그는 한숨을 쉬었다.
시간이 지나, 비가 그친듯 밝은 태양이 방 안에 들어왔다. 이미 얼어붙은 방 안은 태양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이 나고있었다. 새하얀 검에서 나오는 수증기도 그의 손에서 나오는 붉은색의 액체는 얼어붙게 하지 못한 듯 계속해서 떨어져내렸다. 어느새 방바닥은 붉은색의 작은 웅덩이 하나가 만들어져있었다. 그의 얼굴은 처음보다 더욱 새하얗게 변해갔다. 그의 눈에서 물방울이 떨어졌다. 무언가가 기쁜 것인지 입가에는 미소가 띠어있었지만, 이마에서 손을 내린 그의 눈은 잔뜩 찡그린 표정으로 천장을 바라보고있었다.
그의 눈 앞이 점점 흐려졌다. 자신의 어렸을 적 기억부터 어제까지의 기억이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친구들과 함께 놀았던 그 시절, 그리고 그에게 있었던 첫사랑. 이 집에서의 모든 추억이 빠른속도로 지나가며 그의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점점 사라지는 의식의 끈을 놓지않으려는 발버둥일까. 그는 자신의 머리를 주먹으로 계속 내리쳤다. 그러나, 강하게 치는데도 그 고통은 시야와 함께 사라져갔다. 어느새 힘을 풀고 침대에 가만히 누워있는 사내. 가까이 있는 손조차 그의 눈에는 흐리게만 보였다.
점점 정신을 잃어가는 그는 실소를 지었다. 하늘에서는 밝은 빛이 비추는데도 그의 눈에는 검은색의 안개낀 것 같은 시야만이 보였다. 이런 죽음을 맞이할 줄은 몰랐다. 그저 가족들, 친구들 앞에서 편안한 죽음을 맞이하고싶었는데 그럴 수 없다는 게 너무나 안타까웠다. 마지막으로 어렸을 적 자신을 보살펴주던 여성을 보고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않았다. 곧 있으면 그녀를 만나러 갈 수 있다는 생각때문일까. 그의 입에는 점점 미소가 짙어지기 시작했다.
비가 내리던 하늘이 완전히 개어 집 전체에 밝디밝은 빛이 들어왔다. 어느새 집 전체가 전부 푸른색의 얼음으로 뒤덮혀있었다. 아름다운 선율을 뽐내던 오르골조차 더이상은 버틸 수 없다는 듯 드득거리며 멈췄고, 얼어붙은 액자는 지직하며 금이 갔다. 편안하게 잠이 든 것 같은 표정을 한 남자. 그가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리려는 듯 새하얀 검은 계속해서 냉기를 뿜어내며 그의 옆을 지키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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