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사님이랑 무슨 이야기 한거에요?"
카나가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현식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럼 일단 트레시아 데려가서 조금 쉰 다음 조금 있다가 1층 식당에서 다시 모이자."
"네."
말이 끝난 후,카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트레시아에게 걸어갔고 현식은 계단으로 올라가 자기 방을 향해 걸어갔다.
방에 들어가니 로엔카가 로브를 벗고 침대에 대(大)자로 뻗어 누워있었다.
"어, 오셨네요?"
현식은 허리에 차고있던 검을 자신의 침대 옆 벽에 기대어 놓고 침대에 앉으며 말했다.
"조금만 쉬었다가 밥먹으러 내려가죠."
"그러죠."
그 말을 끝으로 잠깐동안의 정적이 흐르고, 현식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로엔카씨, 아무래도 저는 같이 다닐 수는 없을 것 같네요."
그 말에 로엔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현식에게 다가와 물었다.
"왜요? 뭐 때문에요?"
현식은 당황하면서 어색한 미소를 짓고 말했다.
"아, 그게 제가 할 일이 조금 생겼거든요."
"할일이요?"
"네, 어떤 것인지는 자세히 얘기해드릴 수는 없지만, 할 일이 생겨서 따로 행동해야 할 것 같아요."
로엔카는 현식의 말을 듣고 턱을 만지며 조금 생각하더니, 이내 화난 표정으로 말했다.
"트레시아가 또 무슨 얘기를 한건가요?"
갑작스런 정곡에 깜짝 놀란 현식은 곧바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상황읽기가 빠른 것인지, 로엔카는 현식의 표정을 보고 곧바로 달려나가려했다. 그 순간, 현식이 팔을 잡아 제지했다.
"정말 아니니까 트레시아씨한테는 뭐라고 하지마세요."
현식의 말에 한숨을 쉬는 로엔카. 로엔카는 현식의 옆에 앉아 말했다.
"트레시아가 하는 말은 전부 무시하세요. 그 이야기를 깊게 담아들일 필요는 없어요."
현식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저도 나이를 먹을만큼 먹었어요. 꼬마애가 하는 말에 진심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아요."
"그렇다면 왜....."
현식은 상체를 침대에 눕히며 말했다.
"아까 말했다시피 저는 할 일이 있어서 나가는거에요. 물론 여러분들이랑 같이 다니면서 해도 되기는 하지만, 제가 무엇보다 걱정하는 것은 '분열'이에요."
"분열이요?"
"네, 분열. 제가 온 지 얼마 되지않아서 벌써부터 트레시아씨와 로엔카씨가 저 때문에 한 번 크게 싸웠잖아요?"
"그거야 같이 여행하다보면 몇 번이나 겪을 수 있는 일이고...."
"그것 뿐만이 아니라 이번에도 할일이 있다는 제 말을 믿지않고 트레시아씨를 의심했잖아요?"
그 말에 로엔카는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현식은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말했다.
"벌써부터 이렇게 됐는데 제가 남아있으면 뭐..... 안봐도 예상이 가죠."
원래 세계의 전쟁에서도 군인들이 가장 중요하다고 손꼽는 것이 바로 전우애였다. 몇 개의 나라를 제외하고 잘 싸우지않는 군대에서조차 전우애를 중요시하는데, 마왕을 잡으러 가는 사람들 사이에 전우애가 없다는 것은 그냥 죽으러 가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현식은 생각했다.
현식의 말에 곰곰히 생각을 하던 로엔카는 그에게 말했다.
"물론 자신의 동료를 믿지못해 분열이 생긴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현식씨가 빠진다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
현식은 상체를 일으켜 궁금한 표정으로 로엔카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로엔카가 말을 이었다.
"예시를 들어보죠. 함께 다니던 세 명의 동료가 있습니다. 두 명은 강했고, 또 다른 한 명은 약했습니다. 어느 날, 강한 동료 중 한 명이 약한 동료에게 너는 너무나 약하다고 뭐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또 다른 강한 동료가 그 것을 감싸다가 둘 사이에 분열이 일어나게 됬습니다. 자, 여기서. 그 둘의 분열을 막을 수 있는 것이 과연 그 약한 동료가 빠져나가는 것일까요?"
그의 질문에 조금 생각을 하던 현식. 현식이 아무말 없이 생각하고 있자, 로엔카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더 분열이 되겠죠. 그 약한 자라고 해도 동료였는데, 그 동료를 눈치를 줘서 내쫒았다는 것이 또 다른 동료에게 있어서 별로 좋지않은 시선으로 보일 수 밖에 없을겁니다. 세 명이 아닌 네 명 이상의 파티였다면, 자신도 약해지면 쫓겨날 수 있다는 생각에 동료를 믿을 수 없게되거나 자신이 직접 스스로 나갈 수도 있어 파티 자체가 붕괴되겠죠."
현식은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로엔카의 말대로 눈치가 보여 나가게 된다면, 그 눈치를 준 사람을 다른 동료들이 안좋게 볼 것이었고, 그로 인해 금만 가있던 관계가 지진이 난 듯 크게 벌어질 수 있었다.
"그래서 저는 약한 동료가 나가기보다는 그 약한 동료가 수련을 해서 강해지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강해지는 선택지에는 손해라는 것이 없거든요. 자기 자신은 강해져서 좋고, 뭐라고 하던 동료는 더이상 뭐라하지않게 되고, 감싸던 동료도 더이상 그 뭐라하던 동료와 사이가 나빠지지않아서 좋고. 오히려 강해지게 된다면 사이가 더 돈독해지겠죠."
현식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확실히 로엔카씨가 말한대로겠네요. 제가 생각이 짧았어요."
로엔카는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강제로 떠나지말라는 말은 하지않을께요. 할 일이 있다고 하시니까. 그래도 저는 현식씨가 떠나지않았으면 좋겠네요. 저는 한 번 동료로 받아들인 이상 끝까지 같이 가는 것이 동료라고 생각해요."
그 말을 끝으로 로엔카는 문 밖으로 나가며 말했다.
"그럼 밥먹으러 내려가죠."
"그러죠."
1층으로 내려가니, 아직 여자들은 내려오지않은 듯 했다. 현식과 로엔카는 카운터와 가까이있는 테이블에 앉아 음식을 주문했다. 그 이후, 현식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 곳까지 오는 사람들은 많지않은지 많은 자리가 비어있었고, 몇 몇의 강해보이는 사람들만이 맥주가 가득 담긴 거대한 맥주컵을 들고 벌컥벌컥 들이마시며 떠들어대고있었다.
그러나, 그들 중 다른 한 테이블. 몇 명의 여자와 남자로 구성되어있는 파티였는데, 다른 테이블처럼 우락부락한 사람들이 아닌, 모두 젊고 어려보이는 듯한 사람들이었다.
현식은 그 파티가 있는 테이블을 가리키며 로엔카에게 물었다.
"저 파티도 용사가 되려고 여기 온거겠죠?"
로엔카는 현식이 가리키는 테이블을 보더니 턱을 만지면서 생각하며 말했다.
"아마도 그렇겠죠. 용사가 되면 워낙 혜택이 좋아서 많은 젊은 파티들이 도전하더라구요."
"그런가요?"
현식은 그들을 조금 더 훑어보고, 다시 고개를 돌려 테이블 위에 있는 컵에 물을 담아 마셨다.
잠시 후, 계단쪽에서 카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저기있다!"
카나는 현식과 로엔카를 향해 힘껏 손을 흔들며 뛰어왔다. 아까 일에 트레시아는 아직까지 시무룩해있는 것인지 주뼛주뼛거리며 약간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걸어왔다.
트레시아가 자신의 반대편 의자에 앉자, 현식은 트레시아에게 말했다.
"아까는 제가 말이 조금 심했네요. 사과할께요."
현식의 사과를 들은 트레시아는 갑작스런 사과에 당황하더니,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그녀의 표정은 아까와 다르게 많이 풀린 듯했다.
잠시 후, 음식이 테이블에 연이어 나왔다. 꽤나 맛있는 향이 나는 음식들을 하나 하나 집어먹으며 그들은 오순도순 이야기했다. 잠시 후, 누군가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어린 소녀의 목소리. 그러나, 그 목소리는 약간 남을 깔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게 누구야? 프레인 트레시아님 아니야?"
그 목소리에 트레시아의 몸이 굳어졌다. 현식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눈에 처음으로 보인 것은 물렁거리는 거대한 무언가였다. 그리고 그 무언가와 비슷한 크기를 가진 얼굴. 양 갈래로 묶은 검은 머리가 인상적인 소녀. 눈은 크고 코와 입은 작은 편인 귀염상의 소녀였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남을 깔보는 표정이 만연했고, 목소리에서도 들려오는 남을 깔보는 듯한 느낌이 그녀의 첫인상을 안좋게 장식했다.
그녀는 꽤나 단단해보이는 은빛 강철 갑옷을 입고있었는데, 그 강철갑옷을 산 지 새로 되지않은 것인지, 아니면 항상 손질을 하는 것인지는 몰라도 마치 새것처럼 깨끗했다. 뒤에 걸쳐진 갈색의 망토는 작은 키때문에 땅에 질질 끌리는 것인지 누군가가 뒤에서 계속 잡아주고있었다.
소녀는 입 안에 가득 음식을 물고있는 현식을 보며 손등을 입가에 가져가 호호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선언하고 갔으면서 얻은 동료라고는 이런 되먹지못한 남자와 허름한 마법사 한 명 뿐이야?"
트레시아는 입에 문 음식을 꿀꺽 삼키고 말했다.
"조용히 하고 가라."
소녀는 혀를 차며 말했다.
"이런 동료를 구한 너도 참 안됐지만, 너를 따르고있는 동료들도 참 안됐네. 이런 주인이나 따르고말이야."
그렇게 말하고 난 후, 소녀는 카나에게 다가가 말했다.
"너도 빨리 우리 파티로 오는게 어때? 내가 잘 대해줄테니까 말이야."
밥을 먹던 카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 말씀은 감사하지만 죄송합니다."
소녀는 한숨을 쉬더니 뒤를 돌아 걸어가며 트레시아에게 말했다.
"내일 보자구, 트레시아. 돌아갈 준비나 제대로 해놓는게 좋을꺼야."
현식은 돌아가는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려 입 안에 물고있던 음식을 삼키고 물었다.
"저 여자는 누구에요?"
현식이 묻자, 로엔카가 물을 마시며 대답했다.
"트레시아와 검술학교에서 같은 반이었던 '엘체 반 헤페리아'라는 사람이에요. 트레시아가 정확하게 말을 해주지않아서 무슨사이인지는 잘 모르겠네요."
현식은 트레시아를 보았다. 아까 전 풀렸던 표정이 다시 험악해지면서 돌아가는 엘체를 노려보고있었다. 정말로 죽이고싶어하는 표정에 당황하며 현식은 고개를 숙이고 입 안에 밥을 넣었다.
그들은 밥을 다 먹고 또 다시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현식은 여관 안에 있는 목욕탕을 향해 걸어갔다. 원래세계의 목욕탕처럼, 목욕탕의 탈의실에는 수건같은 것과 옷을 담을수 있는 바구니가 준비되어있었다.
그는 바구니에 옷을 벗고 욕탕의 안으로 들어갔다. 욕탕에는 꽤나 많은 수의 샤워기같은 것이 있었는데, 샤워기와는 다르게 샤워기의 머리가 있는 부분에 마나석같은 것이 꽂혀있었고, 그 마나석에서 끊임없이 따뜻한 물이 흘러나왔다. 또한 샤워기의 바로 옆에는 로빈이 머리감으라고 줬었던 비누같은 물체가 하나씩 배치되어있었다.
현식은 몸과 머리카락을 비누같은 물체로 먼저 씻고 욕탕 안으로 들어갔다. 따뜻한 물이 이 때까지 뭉쳐져있던 근육을 풀어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따뜻한 기운때문에 몸이 노곤해지며 금방이라도 잠들 것 같이 졸려왔다. 그러고보니 현식은 여기 온 지 꽤나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샤워조차 제대로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나마 한 것이라고는 카닐에 있을 때 강가에서 얼음같이 차가운 물로 몸에 물을 묻힌 것 뿐이었다. 이 세계에 와서 이런 따뜻한 물로 목욕을 한 적은 처음이었다.
"아, 기분좋다."
자동적으로 흘러나오는 기분좋은 신음소리. 무엇보다도 좋았던 것은 여기에 오는 사람들이 별로 없는 것인지 아직 물은 깨끗하다는 것이었다.
현식이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있을 때, 누군가가 안으로 들어왔다. 삐죽거리는 머리카락에 꽤나 매서운 눈매를 가진 남자. 검사인 것인지 온 몸에는 근육이 자리잡고있었고, 배에는 칼로 새긴 거대한 흉터가 있었다. 그는 현식이 들어왔을 때처럼 머리와 몸을 씻고 현식이 들어와있는 뜨거운 욕탕 안으로 들어왔다.
계속 그를 보는 것이 실례라는 생각에 현식은 눈을 돌리고 다시 뜨거운 물에 집중했다. 잠시 후, 남자가 현식에게 말을 걸었다.
"너, 트레시아와 함께 다니는 동료 맞지?"
중저음의 목소리에서 들려오는 거대한 카리스마가 현식에게 느껴졌다. 현식은 존댓말로 할까 하다가 자신보다 어려보이는데다가 먼저 반말로 한 그에게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고 말했다.
"맞는데, 왜?"